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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공부

[북리뷰] 정희진 -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by 퐁시냥 2021. 12. 15.

 

 

정희진 작가의 글은 담백하다. 군더더기가 없다. 앞으로의 내 인생은 정희진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뉠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내 '외로운' 인생에 지표이자 동반자가 될 것이다. 

 

이 책을 쓰기 위하여 그동안의 얼마나 많은 고통과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공부가 있었을까. 여성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그의 책을 읽으며 그가 남긴 좋은 말들을 공책 한면에 빽빽히 받아 쓰느라 손이 아플정도였다. 

 

올 해 그토록 괴로웠던 이유, 분노와 우울의 근원을 알 수 있었던 책. 마침내 찾아내서 기쁘고 정희진 작가의 다른 책도 다 읽어보고 싶다.

 

  “누구나 알고 있듯이 인생은 너무 힘들다. 인생은 우리에게 너무 많은 고통과 실망과 과제를 안겨준다. 인생을 견뎌내기 위해서는 고통을 일시적으로 완화하는 수단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수단으로 세 가지가 있다. 우리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 고총을 가볍게 생각하도록 하는 강력한 편향, 고통을 줄여 주는 대리 만족, 고통에 무감각하게 하는 마취제.” (246쪽) 

 인간은 원래 행복할 수 없는 종자다. 인간의 행복은 오직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본 고통의 근원은 유한한 육체, 외부 세계, 타인과의 관계였다. 
 이렇듯 모든 혐오의 출발은 자신이다. 자기 내부의 관념에서 나온다. 파시즘이 그 정점이다. 파시스트는 피아, 자아 경계가 없다. 나=세상이다.

181p. 모든 혐오의 출발은 자신이다
<<문명 속의 불만>> 지그문트 프로이트

 

혐오사회가 되고 있는 대한민국. 이토록 서로를 혐오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마치 파시즘과 같다. 나 자신을 혐오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글쓰기는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내게 '여성'은 고통이자 자원이다. 항상 양가감정에 시달린다. 자기 혐오와 연민, 피해의식, 분노가 나를 삼킬 때는 나도 저자처럼 죽고싶다.(202쪽)

178p. 무지는 어떻게 나댐이 되었나
<<나를 대단하다고 하지 마라>> 해릴린 루소

 

여성이 자기 혐오를 하는 것은 이 사회에서 당연한 것이다. 끊임없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여성성'에 맞춰야하고 상품성이 있는 여성으로 사랑받기 위해 평생을 노력한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죽는 여성도 많을 것이다. 문명 그리고 자본주의 이후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왔다. 

 

인간은 변하지 않는다? 자기가 변하지 않을 뿐이다. 아니, 이런 인간일수록 쉽게 변한다. 문제는 무엇을 위해 변하는가이다. 권력인가 아름다움인가. 지혜로운 사람들은 후자를 추구한다. 권력은 타인의 시선이고 아름다움은 자기 충족적이기 때문이다.

126p. 인간은 변하지 않아
<<타인의 삶>> 플로리안 헨켈 폰 도널스마르크

 

변화란 무엇인가. 인간은 변할 수 없는 존재일까? 작가는 인간은 쉽게 변하는 존재이며, 무엇을 위해 변하는가에 따라 결과는 다르다고 이야기한다. 당신은 무엇을 좇아갈 것인가. 권력인가? 아니면 아름다움인가?

 

외로움은 타인과 나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 나의 관계다. 자신이 몰두하는 대상이 몸이 부끄러울 만큼 아름다울 때 인간은 외롭지 않다. 예술, 공부, 사회운동, 정치, 자연이 그런 대상이 아닐까.

154p. 혼자인 것과 함께 혼자여야 한다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미셸 슈나이더

 

외로움이 무엇일까. 이 끝없는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을 했다. 여기서 작가는 외로움이란 타자와의 관계가 아니라 나와의 관계라고 말한다. 타자와의 관계에서 충족되는 부분은 한계가 있고, 결국 나와의 관계, 내가 몰두하는 아름다운 대상과의 관계에서 충족된다. 나에게 그 대상은 예술과 자연 그리고 공부일 것이다. 

 

푸코는 ‘비판이란 무엇인가’라는 강연에서 “비판은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또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미래 혹은 진실을 위한 수단이자 방법이다.”라고 말했다.

87p. 이제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해 왔을 뿐이다
<<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비판이란 무엇인가. 이제까지 내가 생각한 비판은 어떤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푸고의 의견은 다르다. '자신이 명확히 알지도 못하고', '스스로 그렇게 되지도 못할 미래'를 위한 수단이자 방법. 나는 평생 비판속에 숨어 살아왔던 것인가. 

 

사실, 삶과 죽음 사이에는 별것이 없다.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본 풍경이 있을 뿐이다.

74p. 시시한 인생
<<유리문 안에서>> 나쓰메 소세키

 

이 부분도 마음에 들었다. 죽음을 깊게 생각해본 적도 없고 두렵다는 생각도 없었다.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사실 삶은 '죽어 가는 사람이 마지막에 본 풍경'이다. 나쓰메 소세키도 단명한 작가인데 위궤양과 신경쉐약으로 오십살을 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그런 그에게 죽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삶은 견딜 수 없이 절망적이고 무의미하다는 현실의 운명과, 이 무의미한 삶을 무의미한 채로 방치할 수 없는 생명의 운명이 원고지 위에서 마주 부딪치고 있습니다.” (김훈, 2001년)

78p. 작가는 지배하기 위해서 쓴다
<<지배와 해방>> 이청준

 

이 부분이 우리가 글을 쓰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삶은 절망적이나, 이를 방치할 수 없기 때문에 운명에 따르기 위해 원고지 위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리의 삶이다. 

 

시작은 은유 작가님과 함께했던 10주간의 메타포라 8기 온라인 수업이었고, 정희진 작가님의 글로 마무리 했던 한해였다. 올 해는 나름 잘 살았다고 나름대로 자부할 수 있다. 내년에는 적게 내뱉고 많이 쓰는 사람이 되길. 

 

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정희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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